반가워, 2030녀의 ‘팬질 정치’ [한겨레21 2010.01.22 제795호]

젊은 여성은 과연 정치에 무관심한가…
또래 남성보다 투표율 높고,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정치인과 더 깊게 소통



‘투명인간.’ 그랬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치에서 20~30대 여성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40대 남성은 여론 주도층으로 인정받고 50대 이상은 보수적인 투표 성향으로 분석된다. 또 20대 남성은 ‘청년 보수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30대 남성은 중도·진보 성향이 강한 계층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20~30대 여성은 정치에 무관심한 집단으로 인식돼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 1월10일 오후 서울 홍익대 주변의 한 카페에서 열린 20~30대 여성의 정치 성향을 분석하는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여성의 욕망은 정치가 될 수 있는가? 

20~30대 여성은 정말 정치에 관심이 없을까? 대체 20~30대 여성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런 정치적 평가를 받게 됐을까? <한겨레21>은 진보신당과 함께 지난 1월10일 이런 의문을 풀어볼 좌담회를 열었다. ‘여성의 욕망은 정치가 될 수 있는가’란 제목의 좌담회에서 20~30대 여성은 “감성적이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동시에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로 해석됐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이들의 정치 성향은 크게 △비한나라당 △정치인 팬덤 △즐거움과 자발성으로 분석됐다.

1. 비한나라: 정치에 관심 없다? 한나라당은 싫다!

정당 지지율 조사 결과를 보면, 확실히 20~30대 여성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파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가 지난해 매달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를 재분석한 결과, 전체 무당파는 27.5%였다(표본 수 9600명,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1.0%포인트). 30대 여성에서 무당파가 31.7%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20대 여성(30.5%)이다. 20~30대 남성 무당파(각각 28.4%, 28.1%)보다 2.1~3.6%포인트 높다.


그런데 투표율을 살펴보면, 20~30대 여성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리서치앤리서치가 2006년 지방선거 투표율을 세대별로 재조사한 결과, 20~30대 투표율은 30~45%로 전체 투표율인 52.1%보다 훨씬 낮았다. 그런데 이를 성별로 다시 나눠보면, 20~30대 여성의 투표율은 같은 세대 남성보다 높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20대 후반 여성의 투표율은 31.9%로 같은 세대 남성의 투표율(27.4%)보다 4.5%포인트 높았고, 30대 전반 여성(40.4%)은 남성(33.7%)보다 6.7%포인트, 30대 후반 여성(48.3%)은 남성(43.0%)보다 5.3%포인트 투표율이 높았다. 다만 20대 전반 여성의 투표율은 31.3%로, 44.8%인 같은 세대 남성보다 13.5%포인트 낮았다. 어쨌거나 ‘20~30대 여성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명제는 또래 남성과 비교할 땐 ‘거짓’이 된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정당 지지율 조사 결과를 다시 한번 보자. 전체 평균 한나라당 지지율은 34.9%, 민주당 지지율은 20.3%였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율을 성별·세대별로 분석해보면, 20대 여성이 21.4%로 가장 낮다. 전체 평균보다 13.5%포인트나 낮은 수치다. 이를 20~30대 남성(각각 27.0%, 26.2%)과 비교하면 4.8~5.6%포인트 적고, ‘반이명박 성향’이 강하다고 분석되는 30대 여성(24.7%)보다도 3.3%포인트 낮은 지지율이다.

“반MB 성향이 한나라당 기피로 이어져” 



» 2009년 8월23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제에서 민주주의를 가꾸기 위해 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든 젊은 여성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정당 지지율을 보수(한나라당·친박연대·자유선진당), 중도(민주당·창조한국당), 진보(민주노동당·진보신당)로 재분류해보면, 20대 여성이 보수 정당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두드러진다. 전체 평균 40.4%인 보수 정당 지지율은 20대 여성에서 25.9%로 주저앉는다. 같은 20대 남성이 보인 지지율 32.3%, 30대 여성이 보인 지지율 29.6%보다도 낮은 수치다. 반면 20대 여성의 중도 정당 지지율은 27.6%, 진보 정당 지지율은 14.0%로 전체 평균(중도 정당 21.4%, 진보 정당 8.9%)보다 높은 것은 물론 모든 세대와 성별에서 가장 높았다.

30대 여성의 경우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 정당 지지율이 다른 정당 지지율보다 더 높긴 하지만, 평균치와 비교해보면 보수 성향이 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중도·진보 정당 지지율은 각각 23.4%와 12.9%로, 평균을 웃돈다.

김봉신 리서치앤리서치 책임연구원은 “여성은 인물 평가가 정당·정책 평가로 이어지는 경향이 남성보다 강한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런 정당 지지율 차이를 빚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20대와 30대 여성이 정당 지지율에서 차이를 보이는 건 ”30대 여성에겐 결혼 여부, 자녀 유무, 가사노동 등 정치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이 20대 여성보다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또한 같은 정책을 보더라도 30대 여성은 20대 여성보다 실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지지가 높다는 해석도 나왔다.

2. 폴리돌: 노무현의 유산

‘쿨붱(쿨한 부엉이) 이해찬’ ‘시티즌유 유시민’ ‘우윳빛깔 천호선’ ‘냉미남 안희정’ ‘미소천사 김경수’….

20~30대 여성들이 지은 별명이다. 모두 ‘친노 인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인터넷엔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을 전후해 이들의 팬카페가 생겼고,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에서 회원이 많이 늘었다. 이 전 총리 팬카페 회원이 1만 명,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팬카페 회원이 1만3천 명에 육박하고, 다른 카페도 각각 수천 명을 자랑한다. ‘여성 3국’이라고 불리는 소울드레서, 화장발, 쌍코 등 20~30대 여성 중심의 인터넷 카페에서도 이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사상이 섹시한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팬클럽 활동 하듯이 친노 정치인 지지 활동 

팬카페나 ‘여성 3국’ 회원들의 활동은 보통의 연예인 팬클럽과 다르지 않다. 이들을 다룬 기사를 퍼나르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합성해 재밌는 이야기를 만든다. 1인당 1만원씩 돈을 모아 팬사인회를 열기도 한다. 혈액형이 뭔지, 첫사랑은 언제 했는지 따위의 질문을 모아 답변을 받아낸 뒤 ‘100문 100답’도 완성한다. 친노 인사들이 이렇게 연예인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되자 정치인과 아이돌을 합친 ‘폴리돌’이란 말도 생겨났다.

많고 많은 정치인 중에 왜 하필 친노 인사였을까? 20~30대 여성들이 이들에게 열광하는 건 ‘노무현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나 소박한 농부이자 시민으로 돌아간 노 전 대통령에게 친근함을 느꼈고, 갑작스런 서거에 안타까움을 지우지 못한 이들이 노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른 정치인과 달리 ‘자기반성’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앞선 세대와 달리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분신이나 6월 항쟁 같은 강렬한 기억이 없는 20대 여성에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자,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저런 선택을 할 때까지 나는 뭘 했나’ 하는 정치적 각성을 일으킨 일이다. 20대 여성들이 친노 인사들의 팬이 된 건 그런 노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킨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겠나.”



» 성별·세대별 정당 지지율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좌담회에서 연예인 팬클럽 문화 속에서 자란 20~30대 여성이 자연스럽게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한 최지은 <10아시아> 기자의 분석이다.

이는 여론조사 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해 12월21일 벌인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 조사(표본 수 700명, 신뢰수준 95%에 표본오차 ±3.7%포인트)에서 1위는 29.6%를 기록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였다. 눈여겨볼 사람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그는 10.5%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차지했는데, 가장 강력한 기반이 바로 20대 여성이었다. 물론 20대 여성층에서도 박 전 대표를 1순위(34.6%)로 꼽았지만, 2위인 유 전 장관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그의 전체 평균 지지율보다 3배 가까이 많은 28.3%였다. 같은 조사에서 30대 여성의 유 전 장관 지지율은 13.3%로 20대 여성보다는 낮았지만, 평균 지지율보다는 높았다.

팬카페에서 회원들은 ‘폴리돌’의 과거 발언, 현직에 있을 때 추진했던 정책 등을 찾아 토론을 벌이고, 그가 쓴 책을 탐독한 뒤 퀴즈를 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정치인이 대중적으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을지를 놓고도 머리를 맞대본다. 자연스럽게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는 셈이다.

인터넷 카페 ‘소울드레서’와 이해찬 전 총리 팬카페인 ‘대장 부엉이’의 회원인 ‘봄날의 달님’은 “우리가 정치인에게 ‘잘 생겼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보고 연예인 좋아하듯 가볍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짜 잘생긴 연예인도 많은데 정치인을 잘생겼다고 좋아할 리는 없다”며 “존경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의 정치적인 미래에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3. 즐거움과 자발성: ‘깨방정 생활정치’

패션에 관심 있는 20~30대 여성들의 인터넷 카페 소울드레서는 2008년 촛불 정국을 통해 ‘개념찬 20~30대’로 유명해졌다. ‘옷 잘 입기’라는 공통의 관심사는 촛불을 함께 든 뒤 노 전 대통령 분향소 자원봉사, 언론악법 반대 광고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 복지 예산 삭감을 알리는 김장 담그기 등 정치적 문제로 확장됐다. 친노 정치인 팬카페 활동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 1월7일 서울 홍대 주변의 한 공연장에서 여성 4인조 록밴드 ‘스토리셀러’의 열창에 인터넷 ‘여성 3국’ 회원들이 열광하고 있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이날 좌담회에서 ‘봄날의 달님’은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동력은 ‘즐거움’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내가 보탤 수 있는 것을 보태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즐겁게 해내는 것. 우리는 이것을 ‘깨방정 생활정치’라고 부른다. 정치가 어려운 것, 나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내 생활과 밀접한 것이 된 거다. 힘들고 어려운 정치지만, 깨방정 떨면서 즐겁게 해내는 것이 우리가 지치지 않는 힘이다.” 정치·사회적 이슈와 관련한 기사를 누가 올리면 댓글로 수다를 떨고, 누군가 ‘전단지라도 붙여보자’고 의견을 내면 포토숍을 잘 다루는 사람이 디자인을 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문구를 만든다. 전단지를 배포하려고 만날 땐 서로 닉네임밖에 모르지만 온라인으로 나눈 수다 덕분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갑다. 싸늘한 표정의 낯선 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도 금방 끝난다. 즐겁지 않으면 이런 자발성과 참여는 발현될 수 없다.

이들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나 심상정 전 의원 같은 진보 정당 정치인보다 친노 성향 정치인을 더 지지하는 이유도 즐거움의 차이로 풀이됐다. ‘찧고 까불 만한’ 요소, 즉 재미를 주는 캐릭터가 진보 정치인에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좌담회를 지켜본 한 20대 진보신당 여성당원은 “진보 정치인들이 20~30대 여성이 ‘꽂힐 만한’ 이슈를 별로 못 찾아내고 있다. 우리가 평소 어디에 관심을 두는지, 뭘 하고 노는지부터 알아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주의’ ‘동지’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진보 정치인의 언어는 20~30대 여성들이 호감을 느끼더라도 쉽게 다가서기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도 나왔다.

진보 정치인에겐 재미 주는 캐릭터가 부족 

여성잡지 <앙앙> 온라인판의 콘텐츠 디렉터였던 권영신씨는 “(학생운동을 경험한 앞선 세대와 달리) 20~30대, 특히 20대 여성은 정치적으로 조직돼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울드레서 같은 인터넷 카페 활동을 통해 이들은 조직화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조직의 힘으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성공’도 체험하게 됐다”며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문제를, 자신들이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풀어내면서 ‘우리의 욕망이 곧 정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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