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남이 취업녀에게 고백하기 쉽지 않아요"


[오마이뉴스 권지은 기자]

전체 실업률 3.6%. 청년층 실업률 8.1%(2009년 12월 통계). 청년층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두 배 이상이다. 고용상황이 어려우면 20대가 받는 타격은 더욱 심각하다. 통계를 볼 것도 없다. 오늘 내일 일도 아니다. 주위를 조금만 살펴봐도 취업난으로 심신이 시달리는 20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유정아(가명, 26)씨는 자신이 꿈꿔왔던 식품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대학생활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학점도 남부럽지 않게 관리했고 높은 토익점수도 얻었다. 그리고 식품관련업종의 마케터, 인턴쉽 등의 경력 또한 충분히 갖췄다. 하지만 언제나 모범생 소리를 듣는 그에게도 취업 장벽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D대학교에서 편입시험이 열린 지난 18일, 정문 앞에서 편입학원들이 학생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플래카드를 매달았다.
ⓒ 권지은
모든 게 점점 꼬여갔다. '취업 어떻게 됐느냐?'는 질문을 첫 인사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 싫어서 주위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도 피하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취업난에 대한 분노는 자기 자신을 향했다. '내가 이때까지 무엇을 했나', '나는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나' 등을 자문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밥도 맛이 없어졌고,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어졌다.

이때껏 '이태백', '88만원세대' 등 극심한 취업난과 20대의 특성에 대한 말은 무성했다. 지겹도록 유통됐다. 하지만 20대에게는 지겹고도 지겨운,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다. 문제는 이 모든 20대에 관련한 담론들이 20대 스스로의 입으로부터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세대가 그들을 생각했고, 말했고, 분석했다. 왜 20대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20대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그들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경쟁 때문에 인간관계도 파탄 난 20대

18일 장충동 서울KYC에서는 20대들을 대상으로 한 < 2010 변화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체인지 리더' > 라는 프로그램의 6번째 강연회(강연자 탁현민 한양대 교수)와 참가자들의 토론이 있었다. 흔치 않은 20대들의 '현실에 대한 수다'를 경청하기 위해서 이들의 토론을 참관했다.

이날 미래의 '체인지 리더'가 될 20대들은 '취업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주제로 5~6명씩 조를 나누어 토론을 진행했다. 기자는 2조의 테이블에 앉았다. 일단 '취업난'을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단어를 떠오르는 대로 작은 종이에 자유롭게 적어서 서로의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리기 시작했다.

학점, 자격증, 토익, 어학연수 등 '스펙'과 관련된 단어들이 가장 많이 나왔고, 그로부터 20대들이 겪게 되는 4학년 우울증, 목표상실, 열등감, 자존감X, 자살충동, 무기력 등을 적은 종이들도 많이 발견됐다. 물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등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가치관 또한 문제라고 보고 있는 20대들도 다수였다.

취업난이 부른 20대 사이의 심각한 경쟁적 분위기는 20대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소통문제에 있어서도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문성진(22)씨는 '취업난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도구적 인간관계'라고 말했다.

"요즘은 뭐든지 '자기한테 도움이 되냐, 안 되냐'를 경제적으로 따지는 것 같아요. 인간관계에서도 현실적인 이득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 거죠. 그 사람의 인성이나 앞으로의 비전이 아니라 현재 드러나는 것, 스펙, 학벌 등 커리어 같은 거 말이에요. 모두가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상품가치가 없으면 버려지는 거죠."

'체인지 리더' 강연을 듣는 20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와 관련한 영상을 보고 있다.
ⓒ 권지은
남윤철(26)씨는 "영어가 필요하지도 않는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모두가 '토익점수 올리기'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또 그는 취업난이 만든 20대의 '루저'의식(패배주의) 같은 열등감의 만연은 20대가 직면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적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요즘 20대들은 어딜 가나 '어디 취업했느냐', '어떻게 돼가느냐' 같은 질문들을 많이 받잖아요. 그러면 부모님 보기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걸로만 상대방을 평가하니까, 자신감 있게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되는 거 같아요." 모두가 같은 목표를 바라보는 것, 그것을 통해 서로를 살피고 비교하는 것, 그래서 20대가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사회의 보편적 상황이 만들어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물질만능주의'와 '경쟁지상주의'다. 김지연(22)씨는 우리사회의 물질만능주의가 과연 우리가 원했던 것인지 의문을 던졌다.

"친구가 캐나다에 사는데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대학 갈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그 반 30명 중에 10명만 손을 들었데요. 그 나라는 대학 안 나와도 무시하지도, 먹고 사는 데 불편하지도 않으니까요. 우리는 사교육 경쟁 때문에 서로 힘들어지고... 친구가 부러웠어요. 이게(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주의, 경쟁주의가) 100% 자기만족을 위한 건지, 자기가 남들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서고, 조금 더 많이 가져서 남들한테 받는 시선을 느끼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20대에게 '환상적인 미래'는 올 수 있을까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진지하지만 즐겁게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취업, 연예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신의 문제, 나아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고, 그래서 너무나 암울한 20대 삶의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슴이 갑갑해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20대가 이제 '꿈꾸고 상상할 권리'까지 잃은 건 아니다. 우리는 앞서 얘기한 '지독한 것들'이 제거된 '환상적인 미래'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을 해봤다. 문성진씨가 꿈꾸는 20대의 환상적인 미래의 그곳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되찾은 공간이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가능성을 가로 막고 있어서 계층의 수직이동이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모두에게 '가능성'이 있는 사회가 되면 누구나 자신감을 가지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실패해도 언제든지 다시 시도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조급해하지도 않고 용기도 생길 것 같구요."

20대들이 취업난에 연상되는 단어들을 쓰고, 연관 있는 단어끼리 분류시켜 놓은 모습.
ⓒ 권지은
취업난은 한참 연애하고 사랑해야 할 20대들에게서 '로맨스'마저 빼앗아 갔다. 남윤철씨는 지금의 문제들이 해결된 환상적인 미래에는 '조건 없는 로맨스'가 가능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남자들은 군대 때문에 여자보다 취업이 늦어지잖아요. 만약 좋아하는 여자가 취업해 있는 상태라면 남자는 고백하기 정말 쉽지 않아요. 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아이가 언제 취업할지도 모르고 미래가 불확실하면 마음이 있어도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선을 긋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환상적인 미래'에는 20대가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로맨틱한 연애를 할 수 있겠죠?" 상상이라지만 신나고 짜릿하다. 이들의 '아름다운 상상'은 곧 지금 20대가 절실하게 원하는 그것과 맥이 닿아있다. 참석자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자신감 회복' '자아실현'이었다. 이들은 또 20대 문제의 해결이 '학벌 없는 사회'와 '저출산 해소' 등의 사회 전반적인 변화로 또한 연결될 될 것이라는, 세대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으로까지 논의를 넓혀 나갔다.

"20대 투표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20대들의 문제를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다는 최융선 KYC 한국청년연합 사회개혁간사는 '환상적인 미래'를 '현실적 정책'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 20대들의 '체인지 리더' 활동은 20대 유권자를 움직일 수 있는 리더를 키워내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들의 활동은 6월 지방선거까지 이어질 거예요. 지금 했던 20대 당사자들의 토론, 그리고 이들이 스스로 찾아낸 다양한 20대 집단들의 풍부한 토론과 인터뷰를 거쳐서 그들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만들려고 합니다."

최융선 간사는 "지금의 88만원 현실을 만든 건 20대가 아니다"라면서도 "그렇지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 또한 20대일 수 밖에 없다"며 '억울하지만' 해결방법은 결국 20대들의 적극적인 소통과 참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홍구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전에 20대가 '불의'를 보고 참는 건 꼴불견이었어요. 그런데, 지금 20대는 '불이익'을 보고도 참아요. 등록금 문제나 대졸초임삭감 같이 명확하게 20대의 이익과 관련한 문제들 말이에요. 30대는 비교적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해요. 아이 키우는 문제, 집 문제 같은 생활적인 문제니까요. 20대만큼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 것을 터부시하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20대는 자기 세대안에서도, 다른 세대와도 자신들의 속사정을 이야기 나누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암울한 상황'을 '환상적인 미래'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20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최융선 간사는 우선 '관찰할 것'을 20대에게 주문했다. 무엇을 말인가.

"가장 큰 문제가 20대들이 자기 자신을 너무 몰라요. 그리고 이 세대가 어떤 상황인지 사회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구요. 상황을 모르면 해결이 일단 어려워요. 먼저 자신과 20대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래야 분노도 하고, 변화를 가져오게 되기도 할 거에요."


'환상적인 미래'로 가는 길은 어둡지만 빛이 존재한다. 20대들의 현실 또한 어둡다.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저 너머의 밝은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자료사진)
ⓒ 권지은
이제 20대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최융선 간사는 "20대는 사실상 포기할 것이 없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20대들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그리고 다른 세대들에게는 "20대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문제를 20대가 해결해야 한다면, 이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이장, 통장, 반장부터 해서 국회의원까지 '청년할당제'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도 결국 주도권은 20대 스스로가 가지고 있습니다. 20대들이 의지를 가지고 해보려고 하면 저희는 '악착 같이' 도와줄 생각입니다. 두려울 게 없습니다, 뛰어드세요!" '청년할당제' 참여와 더불어 20대가 당장, 아니 5개월 후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지방선거 투표하기'다. 20대가 투표장에 나온다고 해서 갑자기 많은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융선 간사는 "일단 정치인에게 '유권자'로 인식되지 않을 만큼 투표율이 저조했던 20대가 투표율이 올라가면 상황은 변하게 돼있다"고 강조했다. 정치인들이 어르신들만 찾아뵙던 선거 풍경이 이제 대학교 축제로 옮겨올 것을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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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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