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본 한국 영화에서 내 또래 여자 한명을 만났다.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의 주인공 세진. 그녀는 지방 출신에 지잡대(인터넷에서 사용하는 '지방 잡대학' 줄임말)를 졸업하고 운 좋게 취업에 성공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부푼 기대도 잠시, 몇 개월 뒤 회사는 부도나고 그녀는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직장 얻고 한창 잘 나갈 때 옆에 있어줬던 남자는 그녀가 직장을 잃자 눈빛조차 싸늘해졌다. 결국 애인도 잃고 돈도 바닥난 그녀는 다 쓰러져가는 빌라 반지하에 둥지를 튼다.

이대로 고향으로 내려가면 발전 가능성도 없는 작은 사무실의 비서직이나 학원 강사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서울에서 재취업하기 위해 이력서를 들고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패. 어렵게 올라간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들은 그녀에게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거나, 심지어는 유행가에 맞춰 춤추라고 요구하며 낄낄 거린다. 화가 난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말한다.

"가뜩이나 취직 안 돼서 괴로워 죽겠는데 사람을 갖고 놀아? 아무리 약자라고 해도 인간적인 기본 대우는 해줘야 할 것 아니에요?"

영화 속 세진의 행보 하나하나가 얼마나 처절하고 가슴 아프던지, 가벼운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영화 속 가상현실로 그치지 않고 얼마든지 내 주위에서 일어날 법한,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젊은 여성 네 명 중 한 명이 빚에 허덕여


몇 해 전 이른 바 20대를 지칭하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무겁게 젊은 세대의 가슴을 짓누르며 20대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지만, 지금까지 '이태백' '니트족' '캥거루족', 심지어 '잉여'라는 거친 표현이 현실을 냉소하고 조롱하며 인터넷에 떠돌 뿐 실제 20대의 삶이 어떠한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노력은 많지 않았다. 특히 20대에서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남성과 여성의 격차, 지역 격차, 노동 조건 격차 등은 '88만원 세대'라는 큰 덩어리로 묶이면서 그런 차이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야심차게 나섰다. 20대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보고자, 20대 중에서도 더 열악한 조건에 놓일 수밖에 없는 여성 문제를 살펴보고자 나섰다. 그렇게 2010년 하반기에 진행된 '청년층 여성의 노동과 삶 실태조사'는 서울, 인천, 부천, 안산, 대구, 부산, 창원 등의 지역에서 청년층 여성 1317 명의 목소리를 설문지에 담아냈고, 또 심층 인터뷰를 통해 여섯 명의 이야기를 깊이 살펴보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청년층 여성의 25.6%, 즉 네 명 중 한 명은 빚을 지고 있었고 특히 500만 원 이상 빚지고 있다고 응답한 여성이 59.2%에 달했다. 빚의 원인 중 ‘등록금’이 과반수를 훌쩍 넘었고, 대학생 및 대학원생의 23.1%는 졸업하기도 전에 학자금 대출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시급 4,110원(2010년 최저임금 기준)인 아르바이트로는 등록금은커녕 생활비와 용돈도 마련하기 힘들었다. 그나마도 편의점, 주유소, 노래방, PC방, 당구장, 음식점 등에서 카운터/서빙 업무를 보는 아르바이트생 중 32.9%는 최저임금 미만을 받고 있었으며, 비수도권만 따로 보면 47.8%나 최저임금 미만이었다.

 

 

                                               ▲지난여름 진행한 청년희망아카데미 ‘유쾌한 상상, 짜릿한 변화’ 중

                                                참여자들이 작성한 '내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1가지'
 

 

눈높이 낮춰도 일자리가 없다

구직자의 실상은 더욱 열악했다. 현재 무직 여성의 86.9%는 취업할 의사가 있고 취업 자체를 포기했다는 여성은 전체의 1.6%에 불과해 대부분 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젊은 여성은 취업이 좌절되면 취직 대신 ‘취집’을 한다는 사회 통념과는 다른 결과였다.

또한 ‘어디 취업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중소기업’을 1위(23.5%)로 꼽아, 청년층이 눈만 높다고 하는 통념 역시 사실과 달랐다.

희망 연봉을 살펴봐도 사정은 같다. 인크루트가 2010년 조사한 ‘4년제 대졸 신입사원 초임’(상장사 기준)이 평균 2,789만원, 중소기업은 2,475만원인 반면 본 설문 대상자 중 4년제 대졸자는 희망 연봉으로 ‘1,800만 원 초과 2,100만 원 이하’를 1순위(24.2%)로 꼽았다.

이런 결과는 현재 노동시장에 맞게 눈높이를 낮추고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취업 준비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서 이들이 지적한 것과 같이, 일자리 수는 너무 적고(33%, 1위) 일자리의 질 또한 너무 낮아(25.7%, 2위) 스펙 쌓기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청년 실업 문제가 사회에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직 장벽 앞에서 구직자의 부담과 고통은 심각했다. 구직자는 이미 학생 신분에서 벗어났으므로 취업비용을 마련하는 데도 부모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51.9%). 그러다보니 아르바이트 노동시간은 학생보다 길고, 아르바이트 수입도 더 많았다. 취업 준비와 생계비 마련이라는 이중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취업 스트레스도 심해서 구직자의 49.1%는 강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우울증, 불면증을 겪고 있으며, 심지어 전체 구직자의 2.8%는 자살충동을 느꼈다. 구직 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도 겪어야 했다(23.1%).

면접에서 연애, 결혼 및 출산 계획 등의 질문을 받거나(40.7%), 남자만 채용한다는 이유로 이력서조차 내지 못하거나(23.9%), 면접과정에서 남성을 우대하는 분위기를 형성하는(23%) 등의 일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취업자 반수는 월급 150만 원 미만



그렇다면 이 모든 역경을 헤치고 취업에 성공한 취업자들은 상황이 나아졌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답은 ‘아니다'다. 조사 결과 취업자 두 명 중 한 명은 150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나마도 비정규직이거나 30인 미만 사업장에 종사하는 경우 또는 비수도권에서는 150만원 미만이 60%를 훌쩍 넘었다.

 

특히 비정규직은 문제가 더 심각한데, 월급도 정규직에 비해 물론 낮지만 상여금, 휴가 등 모든 부분에서 비정규직이 정규직에 비해 보장받는 비율이 낮게 나타났다. 특히 육아휴직, 산전후 휴가 등 모성권과 관련된 제도는 비정규직의 11%만이 직장에서 보장받고 있다고 대답해, 비정규직 여성 열 명 중 아홉은 모성권 관련 제도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우울한 현실을 여성 청년층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전체 응답자의 60.2%는 ‘미래가 불안하다’고 응답한 반면 단지 28.4%만이 ‘자신감이 든다’고 응답해 많은 여성이 미래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미래가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91.5%가 앞으로 더 나아지거나 밝을 것이라고 답해 미래에 대한 밝은 기대를 드러냈다. 지금 현실은 우울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릴 거라는 기대로 이들은 좌절에서 벗어나 일어서는 것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로 돌아가자. 세진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기업에 입사했고 열심히 일해 ‘최연소 대리’ 명함을 얻는다. 그리고 자기처럼 우여곡절 끝에 입사에 성공한 신입 사원들을 마주한다.


그녀는 부푼 기대감으로 상기한 표정의 신입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날을 회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오랜 고생 끝에 취업에 성공한 후배들에게 그녀가 던지는 말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젊은 세대에게 던지는 말처럼 들려, 자막이 올라간 뒤에도, 그 뒤 며칠이 지나도 그 말이 떠나지 않고 머릿속을 맴돌아 마음이 먹먹했다.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구직자에게도, 등록금 빚에 허덕이고 있는 학생에게도,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비정규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취업자에게도 나는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생존하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맘대로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맘대로 칼럼] 진짜 경험을 하자  (1) 2010.01.13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한때 다른 20대 친구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4번의 연극 공연, 단편영화 2편 출연, 농활, 공활, 기지촌활동, 빈민활동을 비롯한 학생 운동, 게릴라 언론 활동, 과 및 단과대학 대표, 8개월간의 캐나다 생활, 미국, 일본,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여행, 서울로의 독립, 몇몇의 퍼포먼스, 영화 관련 공연 및 행사 기획, 미디어 및 대안문화예술 교육 기획 및 보조 강사, 국제회의 준비, 웹 기획, 대기업 취직, 여성노동운동, 노무사 준비, 영어 강사 및 과외, 단편 영화 제작, 캠페인 조직, 동티모르 인권 프로그램, 활동가를 위한 미디어 교육 강사, 마음수련, 웹 아티스트 활동, 홈페이지 제작, 여성학 1년 석사 과정, 가구 만들기, 스윙 공연, 미대 편입 준비, 언론 홍보, 쉬지 않고 계속된 뜨거운 연애 등. 20대 삶을 되돌아봤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무수하다. 과연 내 삶은 이 모든 경험들을 온전히 끌어안고 있는가?

 돌이켜보건대 내 과거를 채우는 이 많은 경험들은 널브러진 퍼즐 조각들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파편으로 존재했다. 어떤 경험이든 나를 완전히 던져놓고 몰입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나를 스쳐갈 뿐이다. 물론 나도 어느 순간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어떤 일을 성취하기도 했고, 또 무대 위에서 전율에 휩싸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더 나아가지 못한 이 경험들은 그저 술안주 삼아 떠들어대는 회상거리, 아릿한 그리움을 남기는 추억일 뿐, 결코 나의 영혼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

 내 수많은 경험이 진짜 경험이 되지 못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 내게 ‘지금 이 순간’은 없었다. 나는 항상 지금이 아닌 미래의 무엇, 더 나를 빛나게 해줄 막연한 어떤 것에 골몰하느라 바로 지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쁨보다는 고통을, 충만함 보다는 부족함을 먼저 봤고, 나의 행복은 영영 미래에 저당잡혔다. 그 덕에 충분히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할 기회를 잃었던 것이다. 

 둘째, 내 삶의 동력은 ‘불안함’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남들이 쉬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너무 열심히 뛰느라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나에게 말 한번 건네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성실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채찍일 뿐이었다.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달리는 이유조차 모르는 삶. 그것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유 모를 피로로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다.    

셋째,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렸다. 시행착오와 실패도 도전과 경험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능력을 의심하며 자괴감에 빠졌고, 내가 파놓은 고통의 웅덩이 속에서 질퍽거리다 끝내 도망가곤 했다. 언젠가는 처음부터 내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믿었고 계속 파랑새를 쫓아 헤맸다. 결국 무엇이든 제대로 찔러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계곡물에 엄지 발가락만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결국 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셈이다.

넷째, 꿈의 지도가 없었다. 나는 튼튼한 줄기는 없고 잔가지만 많은 나무였다. 꿈과 열정, 삶의 비전과 목표 없이 당장 눈 앞에 놓인 기회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교했다. 이 일과 저 일, 나의 것과 남의 것. 다른 기회가 찾아오면 일단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재보고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그 선택들은 순수하지도 진취적이지도 않았다. 어딜 가나 늘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간 내 삶의 경험들은 더 이상 현재의 내게 유용하지도,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걸까? 그건 아니다. 내가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수록, 나라는 사람과 나만의 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수록 흩어졌던 경험의 조각들이 점점 맞춰지고 있는 걸 느낀다. 아무 개연성 없이 그저 바닥에 뒹굴던 수백의 조각들이 지금에 와서 희미하게나마 스스로 형체를 이뤄간다는 게-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신기할 뿐이다. 더 이상 안주거리도, 추억도 아닌, 현재의 나와 호흡을 맞춰가며 진화하고 발전하는 나의 과거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집에서도 일 생각만 한다면 그건 휴식이 아니듯이, 경험도 나의 삶에 찰싹 밀착시키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는 구름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집착, 불안함, 두려움을 버리고 꿈과 열망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놓으면 어떤 경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안에 머문다. 나처럼 수박 겉핥기 식의 인생을 8년쯤 하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하지만 그걸 깨닫는 순간 죽은 기억들은 다시 생명을 되찾고 내 가슴으로 빨려 들어온다. 적어도 나와 내 꿈을 탐구하기 위한 귀중한 사료가 되어 나를 찾아온다.

 이제는 지금을 발판 삼아 진짜 경험을 하자. 너무 신나고 너무 괴롭고 너무 유쾌하고 너무 힘들어서 까무러칠 정도로. 계곡 물에 온 몸을 담그고 비명을 질러대는 거다. 꺄아아악! 하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