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다른 20대 친구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는 것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4번의 연극 공연, 단편영화 2편 출연, 농활, 공활, 기지촌활동, 빈민활동을 비롯한 학생 운동, 게릴라 언론 활동, 과 및 단과대학 대표, 8개월간의 캐나다 생활, 미국, 일본,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여행, 서울로의 독립, 몇몇의 퍼포먼스, 영화 관련 공연 및 행사 기획, 미디어 및 대안문화예술 교육 기획 및 보조 강사, 국제회의 준비, 웹 기획, 대기업 취직, 여성노동운동, 노무사 준비, 영어 강사 및 과외, 단편 영화 제작, 캠페인 조직, 동티모르 인권 프로그램, 활동가를 위한 미디어 교육 강사, 마음수련, 웹 아티스트 활동, 홈페이지 제작, 여성학 1년 석사 과정, 가구 만들기, 스윙 공연, 미대 편입 준비, 언론 홍보, 쉬지 않고 계속된 뜨거운 연애 등. 20대 삶을 되돌아봤을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무수하다. 과연 내 삶은 이 모든 경험들을 온전히 끌어안고 있는가?

 돌이켜보건대 내 과거를 채우는 이 많은 경험들은 널브러진 퍼즐 조각들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파편으로 존재했다. 어떤 경험이든 나를 완전히 던져놓고 몰입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나를 스쳐갈 뿐이다. 물론 나도 어느 순간에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어떤 일을 성취하기도 했고, 또 무대 위에서 전율에 휩싸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더 나아가지 못한 이 경험들은 그저 술안주 삼아 떠들어대는 회상거리, 아릿한 그리움을 남기는 추억일 뿐, 결코 나의 영혼에 깊이 스며들지 못했다.

 내 수많은 경험이 진짜 경험이 되지 못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첫째, 내게 ‘지금 이 순간’은 없었다. 나는 항상 지금이 아닌 미래의 무엇, 더 나를 빛나게 해줄 막연한 어떤 것에 골몰하느라 바로 지금,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쁨보다는 고통을, 충만함 보다는 부족함을 먼저 봤고, 나의 행복은 영영 미래에 저당잡혔다. 그 덕에 충분히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할 기회를 잃었던 것이다. 

 둘째, 내 삶의 동력은 ‘불안함’이었다. 그 시기에 나는 남들이 쉬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너무 열심히 뛰느라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나에게 말 한번 건네보지 못했다. 나는 그게 성실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채찍일 뿐이었다. 달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달리는 이유조차 모르는 삶. 그것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유 모를 피로로 나날이 지쳐가고 있었다.    

셋째,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렸다. 시행착오와 실패도 도전과 경험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능력을 의심하며 자괴감에 빠졌고, 내가 파놓은 고통의 웅덩이 속에서 질퍽거리다 끝내 도망가곤 했다. 언젠가는 처음부터 내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 믿었고 계속 파랑새를 쫓아 헤맸다. 결국 무엇이든 제대로 찔러본 적이 없는 것이다. 계곡물에 엄지 발가락만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결국 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셈이다.

넷째, 꿈의 지도가 없었다. 나는 튼튼한 줄기는 없고 잔가지만 많은 나무였다. 꿈과 열정, 삶의 비전과 목표 없이 당장 눈 앞에 놓인 기회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교했다. 이 일과 저 일, 나의 것과 남의 것. 다른 기회가 찾아오면 일단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재보고 쉴 새 없이 이동했다. 그 선택들은 순수하지도 진취적이지도 않았다. 어딜 가나 늘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간 내 삶의 경험들은 더 이상 현재의 내게 유용하지도,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걸까? 그건 아니다. 내가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수록, 나라는 사람과 나만의 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수록 흩어졌던 경험의 조각들이 점점 맞춰지고 있는 걸 느낀다. 아무 개연성 없이 그저 바닥에 뒹굴던 수백의 조각들이 지금에 와서 희미하게나마 스스로 형체를 이뤄간다는 게-나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신기할 뿐이다. 더 이상 안주거리도, 추억도 아닌, 현재의 나와 호흡을 맞춰가며 진화하고 발전하는 나의 과거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집에서도 일 생각만 한다면 그건 휴식이 아니듯이, 경험도 나의 삶에 찰싹 밀착시키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는 구름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집착, 불안함, 두려움을 버리고 꿈과 열망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놓으면 어떤 경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안에 머문다. 나처럼 수박 겉핥기 식의 인생을 8년쯤 하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 하지만 그걸 깨닫는 순간 죽은 기억들은 다시 생명을 되찾고 내 가슴으로 빨려 들어온다. 적어도 나와 내 꿈을 탐구하기 위한 귀중한 사료가 되어 나를 찾아온다.

 이제는 지금을 발판 삼아 진짜 경험을 하자. 너무 신나고 너무 괴롭고 너무 유쾌하고 너무 힘들어서 까무러칠 정도로. 계곡 물에 온 몸을 담그고 비명을 질러대는 거다. 꺄아아악! 하고.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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